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부투 세세 세코 (문단 편집) === 사치 행각 === 이렇게 나라를 거덜낸 모부투는 개인 금광을 비롯하여 [[자이르]]에만 11개나 되는 궁전과 호화 요트, 별장들 사이의 이동만을 위한 벤츠 차량들을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세네갈, 브라질 등지에 별장을 구입하는 등[* 실제로 2016년에 모부투가 보유했던 [[스위스]]의 별장이 경매에서 550만 유로(약 77.5억 원)에 매입되기도 했는데, 그 별장은 내부 면적만 700m²에 정원이 6ha에 달한다고 한다. [[https://www.jeuneafrique.com/333697/politique/suisse-banque-ubs-achete-domaine-vaudois-de-mobutu-55-millions-deuros/|#]] 그리고 후술할 모부투의 벨기에인 사위의 증언에 따르면 모부투는 [[벨기에]] 한 나라에서만 [[브뤼셀]] 남쪽에 있는 6ha의 정원과 40개의 침실이 딸린, 800~900만 달러 가치의 호화 별장 샤토 퐁드로이(Château Fond'Roy)[* 우연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별장은 모부투의 고국을 참혹하게 식민지배하며 수만 명 이상을 학살한 [[레오폴드 2세]]의 별장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졌던 곳이다. 하지만 건설이 시작된 1909년에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하며 레오폴드 2세는 이 별장을 쓰지 못했다. 참고로 모부투는 이 별장을 벨기에인 요인들과의 리셉션, 파티 및 국빈 만찬에 썼으며, 별장에는 운전사, 하인, 경호원 등 10명이 상주했다고 한다.[[https://www.tijd.be/sabato/reizen/glamping-in-de-tuin-van-mobutu/9648480.html|#]]] 외에도 총 6채의 부동산과 8채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총 가치는 2,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https://www.lecho.be/sabato/voyages/glamping-dans-les-jardins-de-mobutu/9648484.html|#]]] 많은 재산을 축재했으며, 1997년 5월 26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의 기사에 따르면 모부투가 보유한 외국의 부동산의 총 가치는 4천만~6천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97/05/26/swiss-still-looking-for-mobutu-billions/29424241-7a87-4a37-99c3-2c94044b1450/|#]]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구매 중에는 프랑스의 유명 휴양지 [[코트다쥐르]]에 있는, 미화 520만 달러 가격에 분홍색과 흰색 대리석 기등, 실내와 실외에 각각 하나씩 있는 수영장, 금도금 욕조가 있는 도금된 욕실, 헬기 착륙장을 갖춘 25에이커(약 0.1제곱킬로미터) 규모의 빌라인 빌라 델 마레(Villa del Mare)가 있었는데, 이 별장은 모부투가 1986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구입한 것이었으며, 원래에는 전 [[피아트]] 회장 잔니 아넬리(Giovanni "Gianni" Agnelli, 1921~2003)의 소유였고, 한때 이 별장 별장 근처에는 벨기에 국왕 [[보두앵(벨기에)|보두앵]]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리비에라(Riviera) 해안의 520만 달러짜리 빌라를 구입했을 때 모부투는 계약 후 대금을 달러로 지불할지 아니면 벨기에 프랑으로 지불할 지를 물었다고 하는데, 이는 39배 정도로 차액의 차이가 엄청난 거였지만 모부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70년대 스위스 레만호 부근에 8백만 스위스 프랑(SFr)의 별장을 구입했고 정기적으로 스위스를 드나들었으며 스위스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뒤에는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다. 거기에 1980년대 말에 모부투가 구입한 '카마뇰라(Kamanyola)'라는 호화 요트는 100여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과 60개의 객실, 2개의 VIP실, 심지어 미용실까지 갖춰졌다고 한다. [[https://img.over-blog-kiwi.com/0/93/15/04/20190225/ob_3c477a_rdc-9.JPG|카마뇰라의 실제 모습]] 심지어 여러 증언들을 조합해보면 모부투의 식생활은 과장 좀 보태면 '''그 [[김정일]]과 대등한 수준으로''' 호화로웠다고 한다.[* 이는 부패 독재자 2위를 차지한 마르코스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로버트 무가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별장과 명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으면서도 식사는 전반적으로 채식 위주로 검소하게 한 것과 부패 독재자 1위를 차지한 수하르토가 아예 [[컵라면]]을 즐겨먹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탈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실 특출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독재자들이 소박한 식생활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오히려 소위 [[백두혈통]]과 모부투가 특이 케이스인 셈이다.] [[1985년]]에 고향 그바톨리테(Gbadolite)의 별장에서 55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 모부투는 세계 최고의 [[파티시에]]로 꼽히던 프랑스인 가스통 르노트르[* Gaston Lenôtre, 1920~2009. 아버지가 호텔 주방장에 어머니는 명문 은행가 집안의 개인 요리사였던 요리사 집안 출신이었으며, 1960년에 파티용 빵과 케이크를 배달해 주는 '파티 출장업'이란 새로운 업종을 창안하며 세계 12개국에 케이터링 지점망을 구축하고 특별한 이벤트와 국가 행사 등의 케이터링을 맡았고, 1971년에는 '에콜 르노트르'란 프랑스 최초의 요리학교를 개설했다.]에게 '하얀 크림을 얹은 커다란 데코레이션 케이크'를 만들게 하고는 이를 콩코드에 실어 나르게 했으며, 또 한 번은 특별한 행사를 위해 [[폴 보퀴즈]]를 위시한 유럽의 최상급 요리사를 초대했고, 1988년에 이 곳을 방문한 [[뉴욕 타임즈]] 기자에 따르면 '제복을 입은 웨이터는 리모주 도자기에 메추라기 구이를 서빙하고 적도의 열기에 적절히 식힌 루아르 밸리 와인을 따랐다'고 한다. [[https://www.sun-sentinel.com/news/fl-xpm-1988-11-24-8803080652-story.html|#]] 참고로 모부투는 영양, 생선 및 장어와 같은 전통적인 지역 음식을 좋아했으며, 금박을 입힌 도자기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고, 핑크색 로랑 페리에 샴페인을 하루에 아침부터 여러 병 마시면서 별장에 15,000개의 와인이 보관된 세계 최고의 와인 저장고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와인도 좋아했고, 프랑스 포도원의 포도로 만든 최고 빈티지 와인을 자이르로 직수입하며 마셨으며, 개인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로 직접 [[브랜디]]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게다가 그바돌리테 인근에는 모부투 일가가 보유하던,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한 용도로 스위스 소, 베네수엘라 양[* 모부투는 정부 소유의 [[DC-8]] 여객기를 베네수엘라에 1년 동안 32번이나 보내 털이 많은 양을 5천 마리나 가져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염소를 기르는 목장과 기름야자, 오렌지나 자몽, 파인애플과 같은 과일, 농작물을 기르는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부투는 절대 혼자서 식사하지 않았고, 항상 최소 100명, 때로는 최대 1,000명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부투는 1인당 GDP가 215달러(2023년 환율로 약 461달러)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상술한 것처럼 초인플레이션이 자이르를 강타한 [[1992년]] 7월 4일에 딸 야크프와(Yakpwa, 별명인 '야키(Yaki)'로도 불렸다)와 벨기에인 사업가 피에르 얀센(Pierre Janssen)의 결혼을 위해 2,500명이 넘는 하객들을 초청하고는[* 모부투는 호텔에 도착한 하객들에게 정확히 10억 자이르가 든 상자를 제공했는데, 이 시점이면 10억 자이르는 [[말보로]] 담배 1갑 가격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바닷가재와 캐비어, 1천 병 이상의 고급 와인, 핑크 샴페인을 제공한 후 오케스트라 3개, 프랑스의 특별 전세기로 날아온 13피트(약 4m) 높이의 75,000달러짜리 웨딩 케이크,[* 전세기를 쓰는 데에도 75,000달러를 또 들였다고 한다.] 딸만을 위한 7만 달러의 웨딩 드레스와 300만 달러의 보석[* 참고로 [[아이티]]의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1980년 결혼식에 들인 '''전체 금액'''이 200~300만 달러였고, 이 때문에 뒤발리에의 결혼식은 '최고 호화 결혼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을 정도였는데 모부투는 결혼식에 쓸 전체 금액도 아닌 '''보석값에만''' 300만 달러를 쓰며 뒤발리에의 기록을 거뜬히 뛰어넘었다. 더구나 1980년 기준 아이티의 1인당 GDP는 약 245달러(2023년 환율로 약 894달러)로, 환율 변동을 고려하지 않아도 1인당 GDP가 1992년 기준 자이르보다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부투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독재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불꽃놀이가 포함된 초호화 결혼식을 치르고도 결혼식 선물 비용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초호화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야크프와와 얀센은 후에 이혼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